7 회
1-11. 허무한 인생
눈을 뜬다.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아침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일어나서 커튼을 살짝 들춰본다. 저녁 노을이다.
오후 5시 반 정도 된 듯 하다. 8개월이 다 되어가는 마카오 생활이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밖의 풍경이 낯설다.
식탁 위에는 몇 개의 카지노 칩과 국물이 남아있는 일회용 라면 용기가 몇 개 뒹굴고 있다.
언제 면도를 마지막으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TV에서는 브라질과 독일의 2002년
월드컵 결승을 재탕 해주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에 올랐다. 마카오로 도망 나온 신세지만 열심히 응원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나는 이제 슬슬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힌다.
911 테러가 벌어진 그 다음날 주식시장은 개장과 동시에 휴장에 들어갔다. 개장하자마자 몇 초 후 선물 호가창에 매수 잔량이 없고 매도 잔량만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선물 전일 종가 66.75에서 9월 12일 선물 시가 61.95
하지만 바로 하한가인 60.10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무려 10%가 하락해 버린 것이다. 선물이 하한가에 도달 했는데도 종목 하한가가 15%인 현물 시장은 더 난리다. 코스피 200은 순간적으로 12% 이상 밀려 버린다.
옵션시장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였다. 만기 전날인지라 당월물 풋은 천정을 뚫고 하늘로 로켓처럼 날라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새로이 옵션 포지션에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하지만 잡혀있던 포지션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사무실에서 택환이와 밤새 공포에 떨며 맞은 시장이었지만 그 공포가 현실로 다가 오는 데는 1~2초도 걸리지 않았다. 전일 73억 원의 잔고는 장 시작과 동시에 마이너스 11억 원이 되어 버렸다. 밤새 그래도 몇 푼 건질 것으로 서로를 위로 했던 택환이와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 붙어버렸다.
그리고 4일 후 나는 홍콩 행 비행기를 탔다. 투자자문 인가가 나오기 전에 사고가 터져 버려 모든 것이 나의 개인적인 책임이 되어버렸다. 70억 원의 채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잠시 피해 있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카지노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면 그나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지노 문을 나서면 잊었던 모든 것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나를 짓 눌렀다. 택환이와는 마카오에 오고 나서 두 달 간은 연락이 되었지만 이후 연락이 끊겼다. 가지고 나온 돈도 6개월 지나니 바닥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카지노 게임을 하지도 못하면서 카지노 주변을 맴도는 앵벌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처음 두세 달 다달이 내던 게스트하우스 방값을 6개 월치 선불을 내 놓은 것이다. 그 6개월이 이번 달 마지막이다. 다음달이면 방을 비어주어야 한다.
며칠째 카지노에 가지도 않았다. 그냥 마카오 거리를 관광객처럼 떠돌아 다녔다. 작은 마카오지만 볼 거리가 많은 곳인 것을 마카오에 온 지 9개월 만에 알게 되었다. 관광지에서 가족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특히 그 가족들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면 눈물이 그냥 흘러 내렸다.
마카오에는 오래 된 성당 유적들이 많다.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복사를 하기도 했다. 성당 주변에서 나는 지나 온 나의 삶을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사실 오늘은 결국에 남은 단 하나의 길을 가려고 맘 먹은 날이다. 다시 브라질과 독일의 월드컵 결승을 재탕하고 있는 TV에 눈이 갔다.
1-12. 삶을 정리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마음 속으로 세며 몸을 일으켰다. TV 를 끄고 방을 정리한다. 정리가 아니고 사실 짐을 싸고 있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첨 이곳에 올 때 들고 온 여행용 슈트 케이스를 열고 그 안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전일 구해 온 커다란 검정 비닐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식탁에 앉아 카지노 칩들을 정리한다. 2400불 정도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45만원 정도이다. 그나마 이거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일주일전 호텔 비지니스 센터 컴퓨터를 이용 포탈에서 '자살' 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고통 받지 않고 자살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는데 자살을 말리려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글들은 자살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사실 무서웠다. 하지만 두 달 전부터 다가온 자살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이제 나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두 달 동안 내 사정을 들어 줄 누군가를 만났다면 나는 그 고비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지만 맘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들 카지노 겜을 하러 온 사람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나 죽으려고 해요 내 고민 좀 들어주세요 하는 미친 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문을 열고 인기척을 살핀 후 쓰레기를 먼저 갔다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방에 돌아와 여권과 지갑을 비닐에 넣고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스카치 테이프로 동여 맸다. 허리에 차는 가방을 열고 여권과 지갑이 든 비닐을 넣으면서 그 안을 살폈다. 카지노 칩 그리고 생수병 하나... 생수병 안의 내용물은 소주이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카지노에 들려 모든 칩을 환전했다. 그리고는 500 m
정도 떨어진 한국 음식점을 향했다. 마지막으로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다. 구석자리에 앉아 김치찌개를 시키고 주인 몰래 물컵에 가지고 나온 소주를 한 가득 따랐다. 생수병에 담긴 소주가 절반 정도 줄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가 나왔지만 절반 정도 밖에 먹지 않은 채 따라 놓은 소주를 다 들이켰다.
밖으로 나오니 약간 취기가 올라온다. 마카오 타이팟 브릿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걷는 중에 다시 많은 생각이 떠 오른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생각을 떨쳐 낸다.
타이팟 브릿지가 눈에 들어 온다. 발걸음이 무겁다. 너무 힘이 든다. 주저 앉아 담배 두 개피를 연신 피었다. 품어내는 연기 속으로 지나온 내 인생이 하나 둘 지나간다. 담배 값에 남은 담배 개비를 세어 본다. 5개피가 남았다. 라이타를 담뱃갑 남은 공간에 쑤셔 놓고 다시 다리까지 한숨에 뛰어 갔다. 숨이 차다. 다리 인도에 올라서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다리 반대편이 아닌 시내 쪽을 바라 보았다.
오늘밤도 마카오의 밤은 네온사인으로 화려하다. 차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그들이 내는 소음소리들과 잘 어울려 허공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시 다리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다리 가로등이 비추고 있지만 건너편은 멀게만 느껴졌다.
다리 아래 편을 내려다 보았다. 넘실대는 물이 까맣게 보였다. 물이 검정색이라니.. 다시 반대편을 바라보고 나는 남은 소주를 생수병 채로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100m 달리기 선수의 출발 포즈를 취했다. 다행히 다리 인도 위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숨이 거의 차오를 즈음 난간을 넘어 몸을 던졌다.
검은 물이 눈 앞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건 시각이 느끼는 것이었고 머리 속은 슬로우 비디오 처럼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 슬로우 비디오가 끝날 떄가 되자 내 몸은 두 동강이 나는 충격을 받으며 검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911 테러에 460 초반을 찍었던 주식시장은 택환이와 나의 예상한대로 월드컵을 앞두고 빠른 속도로 반년 만에 940대까지 두 배 이상 급등을 했다. 대한민국은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만들어 냈고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던 그때 나는 그렇게 내 몸을 던졌다.
주식 차트의 봉은 시가 고가 저가 종가 4개의 시세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봉들은 상방 추세를 만들기도 하고 하방 추세를 만들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박스 권을 이루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인간들의 탐욕으로 만들어 진 것이고 그 탐욕에 빠져 모든 것을 짊어지고 뛰어 들었던 나는 그렇게 차트 속에 인생을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파생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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