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회
1-1. 본격적인 몰락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명퇴금 계산이나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기산실업은 거래량을 수반하면서
5,000 원대에서 게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재학 말로는 물량 소화구간이라고 했고 조만간 목표가에
무난히 도달할 것이라 했다. 그래 내가 보아도 그런 모습으로 보였다. 이전에도 이런 모습 보인 후에
급등이 나타난 형태를 보았었고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이재학의 말투에서 형님인데 동생
한번 믿어봐야지 라는 생각을 했다.
은행에 출근은 하지만 이제 3개월 정도만 더 다니면 되고 은행에 나오면 뭐 하고 먹고 살지 고민한다고
밤에는 신나는 유흥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IMF 체제하에 허리띠를 동여매고 있었지만 나는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전일 먹은 술이 머리를 지끈지끈한 상태에서 HTS를 접속했다. 개장하자마자
기산실업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러더니 개장 후 10여분 만에 상한가에 안착해 버린다. 상한가 6,290 원..
내 계좌는 따블이 되어 잔액이 4억을 넘어섰고 친인척 관리계좌도 5억 가까이 되어 있었다.
상한가 잔량이 20여 만주나 되고 나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은행 안을 둘러 보니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나와 함께 명예퇴직 신청한 친구는 아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고… 배가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신문을 들고 화장실을 향했다. 신문에는 온통 부도나는 기업이야기 직장을 떠나는
사람이야기 엄청 오른 환율에 유학간 자녀 학비 걱정하는 이야기 다들 힘든 이야기뿐이다. 나만 행복한 것
같은 세상이었다.
자리에 돌아와 다시 한번 HTS를 들여다 본다. 10여분 지났을 뿐인데 또 확인이다. 여전히 상한가 잔량은
3만주 더 늘어나 있었다. 이제 하루가 따분해지기 시작한다. 몸도 피곤하고 S 호텔의 안마 생각이 난다.
그래 안마나 받고 오자. 자리를 비워도 어느 누가 뭐라 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지점장에게
대충 둘러대고 자리에 와서 HTS를 끄고 나가려 하는데 기산실업 잔고 64,140 주가 눈에 들어 온다.
그래 40주만 팔자. 25만원 상당이다. 마사지 받고 오늘밤 소주 한잔할 돈이 된다. 10주씩 4번에 걸쳐
매도 주문을 냈다. 누군가 40주를 받은 것이다. 속으로 난 참 맘씨 좋은 사람이야. 내 40주를 누가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고마워 해야 할 꺼야.
S 호텔 사우나 내에 있는 마사지는 당시 인기가 상당했다. 오전 11시 정도에 도착하니 한산했다. 목욕을
마치고 마사지 침대에 누었다. 아가씨의 손길이 내 몸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그냥 좋다. 아니 간지럽다.
나는 누가 내 몸을 만지면 그냥 간지럽다. 형식적인 안마를 30여분 대충 하더니 본격적으로 내 몸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나는 누워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기분 좋은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 마무리 되고 아가씨는 별일 없다는 듯이 나를 일으켜 마무리 등 안마를 해 준다. 기분은 좋은데
몸은 더 피곤하다.
사우나 식당으로 나와 도가니탕 하나에 소주 하나를 시켰다. 몸 보신에 해장까지.. 소주 반 병을 먹고 나왔으나
밖에 나오니 추운 날씨여서 그런지 딱 좋은 기분이다. 느릿느릿 은행에 돌아오니 장 마감이 될 시간이었다.
HTS 에 다시 접속을 한다. 예전에는 접속하는 시간이 짜증이 났는데 오늘은 그냥 편안하다. 어차피 답을 아는
시험지 보는 기분 인지라.
그런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기산실업은 종가 4,650원 하한가..
하한가 잔량은 60여 만주…
머리가 띵하다. 이거 뭐야…. 전일 종가 5,470 원에서 개장 10여분 만에 상한가 6,290원 그런데 종가가
하한가 4,650원
분봉 차트를 열어본다. 1시부터 상한가에서 거래가 조금씩 생기다가 1시 30분 이후부터는 상한가에서 거래가
크게 터졌고 1시 50여분에는 상한가에서 6% 정도 밀렸다가 10분만에 다시 상한가 진입하고 2시 이후에는
상한가가 깨졌다가 다시 상한가 오가다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여 2시 50분 동호가 전에는 보합부근까지 밀렸고
동호가에서 하한가로 마감이 되어있었다. 거래량이 2백 30여만 주 최근 활발했던 일 평균 거래량이 50여
만주였으니 4배 이상의 거래가 터진 것이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이재학 전화번호를 눌었지만 통화 중 이다. 두세 번 걸다 포기하고 조민구에게도 전화를
해보지만 마찬가지이다. 난리가 나긴 난 모양이다. 자리에서 이러나 밖으로 나와 담배 하나 물고 하늘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추운 날씨인데도 하늘이 참 맑았다. 와이셔츠 바람인데도 전혀 춥지가 않았다. 다시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삼삼오오 걸어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분명 아침에는 내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는데 이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것 같았다.
자리에 돌아와서 팍스넷에 접속한다. 기산실업 종목게시판은 난리다. 누구는 이럴 줄 알았다는 둥 누구는
상한가에서 다 정리하고 다른 종목 갈아탔다는 둥 누구는 기산실업 상장폐지 될 것이라는 둥… 그러다 남에
드는 글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개미털기네요.. 그냥 안전벨트 메고 걍 버티세요. 20일선 조정 하고 나면 또 날라 갑니다.’
그날 밤도 난 술을 마셔야만 했다. 우울함과 불안함을 나려 버리러 더 마셔야 했다.
다시 아침이 왔고 술 기운에 잠을 자기는 했지만 일찍 은행으로 출근하여 개장 시간을 기다렸다. HTS 도
미리 켜 놓고… 9시 개장 그러나 기산 실업은 시초가가 하한가였고 하한가 잔량은 40여 만주.. 그리고
장마감까지 하한가였고 거래량은 20 만주 였다.
3일 점하를 기록하고 기산실업은 4일째에야 거래가 다시 활발해졌다. 활발한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450만 주의 거래량이 실리며 조금 상승한 2,920원에 마감 되었다. 내 계좌야 그럭저럭 본전 이지만 친인척
계좌는 3억에서 8천만여 원 손실이 발생하고 있었다. 잘하면 2~3일 안에 전체적으로 본전이 가능할 것 같았고
그 정도에서 마무리 하자고 맘을 먹었다.
그때 공기업에서 정년 퇴직하신 외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요즘 장세가 좋지 않은데 어찌 잘되고 있냐..?’
‘네.. 삼촌 수익이 크지 않지만 그럭저럭 안 까먹고 있어요.’
‘명식이가 결혼한다고 처자를 데리고 왔어. 이번 달 말까지 정리해서 돈 좀 빼줘라. 수고비는 네가 알아서
좀 넣어 두고’
‘아이고 삼촌 무슨 수고비요. 명식이 장가 간다는데 제 수익이라도 보태서 돌려 보내 드릴께요’
이번 달 말일까지는 2주일 정도 남았고 외삼촌이 맡기신 돈은 1억 5천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 기산실업은 아예 거래가 되지 않고 있었다. 거래정지 사유는 대표이사 횡령배임 관련
조사 건이었다. 그리고 3일 후에는 다음과 같이 공시 되었다.
주권매매거래정지 기간변경
1. 대상종목 |
㈜기산실업 |
보통주 |
|
2. 변경사유 |
상장 적격성 실질검사 대상결정 |
||
3. 정지기간 |
가.변경전 |
1998년 2월 14일 ~ 상장적격성 실질검사 대상여부에 관한 결정일까지 |
|
나.변경후 |
1998년 2월 14일 ~ 상장폐지사유 해당여부 결정일까지 |
나는 한 순간에 주식실패자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2억의 주식 자산이 이제 3억의 주식 채무로 변해
버린 것이다.
1-1. 인생의 밑바닥으로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나 큰 일이 벌어졌기에 뭘 어찌 해야 될 지를 몰랐다. 밤새 골똘히 생각해보니
나 역시 작전의 중심에서 멀어져 버렸고 그들에게서 버림받고 먹이감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았다. 그제서야
조민구가 그날의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고등학교 동창 그것은 이 바닥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민구는 어느새 나에게 칼날을 들이 밀었고 나는 그 칼날에 제대로 찔린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은행에 출근하자마자 지점장 실로 향했다. 눈도장만 찍고 나갈 생각이었다. 조민구나 이재학을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점장은 아직 출근 전이었고 멍하니 자리에 30여분을 앉아 그의 출근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를 않았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나는 은행을 나섰다.
민구 녀석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으로 차를 몰았다. 세종로 미대사관 뒤 편에 위치한 민구 녀석 사무실을 몇 번
가본적이 있었다. 혹시나 가면서 조민구와 이재학의 핸드폰을 걸어 보았지만 이제는 통화 중이 아니라 아예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종로를 지나치면서 민구 이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별 생각도 들지 않고
무작정 닥쳐 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민구 녀석 사무실 빌딩 앞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빌딩을 들어서면서 나는 정신 바짝 차리자고 머리를
주먹으로 몇 번 쳐 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6층에 내리자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함께 술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는 체 하기도 뭐한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게 멍하니 둘러보고 있다가
나는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지점장님’
‘신대리….’
지점장은 나보다 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일단 지점장의 소매를 잡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와 빌딩 밖으로 나왔다. 2월의 찬바람이 빌딩 사이를 뚫고 불어 오고 있었다.
‘신대리 자네도 기산실업에 돈 넣었나?’
지점장은 찬바람 속에도 벗겨진 이마에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점장과 함께 난파를 당한 것이
잘 된 것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네.. 지점장님은 얼마나?’
둘은 그렇게 그곳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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