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회
1-5. 인생의 밑바닥에서
기산실업에서 넉 다운이 된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점장과 나는 몇몇 피해자들과 함께 조민구
일당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실 찾는다 하여도 법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주식 작전 판떼기에서 피해자들은 손실 보고 피해 본 것으로 그만이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상을
기대 할 수 없다. 사실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욕심으로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놓고 그 피해를 보상해 달라....
억울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제서야 은행이라는 직장이 얼마나
좋은 직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퇴 신청을 해 버렸고 3개월 이라는 시간으로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동료들은 명퇴금에 주식으로 번 돈도 있으니 이제 나가시면 좋은 사업하셔서 더 큰 돈 버시라고 덕담을 했지만
난 그들이 부러웠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는 외삼촌에게 돌려주어야 할 1억 5천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제 기한이 며칠
남지도 않았다. IMF 상황에서 1억 5천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년을 은행원 생활을 해 온
나였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자산은 방배동에 있는 35 평짜리 아파트 하나였다.
기한을 일주일 남기고 결국 나는 아파트 집 문서를 들고 다른 지점에 근무 중인 가장 친한 은행 동기 녀석인
김정두를 찾아갔다.
그날 밤 정두에게 그간의 모든 일을 털어 놓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어차피 2~3개월이면 떠날 은행이었기에
나는 정두에게 명퇴금과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로 일단 1억 5천의 급한 불 끄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고 나와
달리 은행 내에서 평판이 좋았던 그 동기 녀석 덕에 외삼촌에게 그 돈을 돌려 줄 수 있었다.
일단 부모님 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 나의 엉망 된 경제 사정을 털어 놓지 않고 그 일을 마무리 지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빚이 한 푼돈 줄지 않은 것은 분명했고 앞으로 은행이자를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은행을 그만두고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자 했던 그 꿈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었다.
1-6. 기사회생
이제 다음 주면 은행을 나와야 한다. 그 동안 은행에서 월급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내가 은행에 대출이자를
내야 한다. 그 때 정두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데 일자리를 정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한 번 사람을 소개
해주고 싶다고 했다. 기술력 있는 벤처 사장인데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이틀 후 역삼동 일식집에서 정두를
만났다. 정두는 우리또래의 한 사람과 함께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이 건넨 명함은 다음과 같았다.
"인비 시스템 CEO 조 명 환"
한 눈에 봐도 잘 차려 입은 정장에 자신감과 똑똑함이 묻어나는 인상의 조사장은 정두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내 남을 일단 편안하게 해 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 해 보니 조사장은 정두의 은행
고객이었고 우리와 같은 학번으로 나름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벤처 기업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두는 그런 조사장에게 내 자리를 부탁했던 것이다.
조사장은 앞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비전에 대한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했으며 기술적인 면에서는
회사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었으나 자금 경리 분야의 인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두를 통해
대충 이야기를 들어 은행 업무 경험에 주식관련 경험이 있어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나야... 뭐 딱히 뭐 하는 회사인지도 분명치 않고 사장이 동갑인 것도 맘에 걸리고 했지만 당장 은행을
관두고 할 일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 관심을 보이는 척 했다. 또한 정두에게 받은 도움도 있어 그리 했다.
다음날 정두는 나에게 전화해서 조사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 내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관심을 보여
할 수 없이 그런 자리 만들었다고 하면서 오히려 미안해 했다. 정두가 그리 이야기 하니 일단 조사장 회사에
조인 해서 그 월급으로 대출이자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벤처회사의 자금담당이사 명함과 지난 10년의 은행 경력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인비 시스템에서 1년은 나에게 커다란 도전과 변화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다음해 가을 인비 시스템은 코스닥
상장에 성공을 하였다. 1999년 코스닥 광풍이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것이다.
액면가 500원인 인비 시스템 주식은 공모 경쟁률이 160 대 1 이었고 상장일에 종가 5,210원 그리고 며칠을
그냥 점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이면 전날보다 내가 가진 주식 가치는 그냥 12% 상승하였다.
그리고 1999년 말 인비시스템 주가는 거의 15만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가진 주식가치는 20억 가까이
되었고 나는 일개 은행원에서 잘 나가는 벤처 기업의 성공한 자금담당임원 (CFO)로 매스컴에 오르기도 했다.
정말이지 1년 반 만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더 이상 대출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집을 넓혀
이사했다. 기산실업 때문에 생긴 친인척의 빚도 넉넉히 돌려 주었다.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멋진 일이 내게 생긴 것이다. 예전의 자신감도 찾고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 오래된
친구들이 다시 연락을 해 왔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크게 다시 일어서고 있었고 서서히 예전 기산실업에서의 큰 실패도 차츰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1999년 겨울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대한민국이 IMF와 코스닥 광풍이라는 두 개의 혼돈으로 정신 없어 하던
어느 날 조명환 사장은 나를 그의 방으로 불렀다.
'신이사님.. 우리 회사 주식 얼마까지 갈 것 같아요....?'
분명 나와 동갑인 조사장이었지만 인비 시스템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그가 분명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님이 예전 고위 공무원이었고 미국 유학파에다 여기 저기 인맥이 미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신이사님 예전에 주식작전 세력과 일도 해 보셨다면서요.... 만약 작전 세력이 우리 회사 주식을 관리하고
있다면 목표가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 안 해 보셨어요...'
나의 아픈 곳을 또 찔러대는 조사장이다. 하지만 밉지는 않다. 이 사람 덕에 나는 기사회생 했으니...
'신이사님...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파티를 끝 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네요... 한번 신이사님도
알아 보시고 언제 얼마에서 우리가 회사 지분 구조를 변화시켜야 하는지 알아 보세요...'
자리에 돌아와 조 사장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기산실업에서 당한 때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조사장이 이야기 하기 전 나는 우리 회사 주식의 목표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아니 어떤 세력이 우리회사 아니 대한민국 코스닥 시장 전체로 작전을 피고 있다면 분명 목표가가
존재 할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성격적으로 보스 기질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탭으로서는 상당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 인생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그런 것이었다. 당시 조 사장은
나에게 정말이지 행운의 만남이었다.
1999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도 나는 사무실에 나와 우리 회사와 코스닥 시장에 대한 작전 세력 의중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다. 나를 믿어 준 조 사장에 대해 그렇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조 사장의 한마디에 긴장을 하고 인비시스템의 모든 자료를 놓고 분석을 해보니 당시 주가 178,000원은 말이
되지 않는 주가였다. 액면가 500원 짜리가 178,000원...
조만간 버블은 터진다. 그 시기가 언제냐...
2000년 1월 중순 나는 조 사장에게 그간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보고를 했다. 2000년 4월 이전에 코스닥이
무너진다는 내 보고에 조 사장은 심드렁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스닥 시장 붕괴에 대한 나의 대처 계획을
설명하자 조 사장은 관심을 크게 보이며 그 계획대로 밀고 가라고 했다.
결국 조 사장과 나는 코스닥 붕괴 이전에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무난하게 2000 년 중순 지분 구조 변화를
이루어 냈고 법적인 태두리 안에서 챙길 만큼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계획대로 나는 인비 시스템을
떠났다. 조 사장도 몇달 후 2기 경영진을 구성하고 뒤로 물러서고...
무일푼으로 인비 시스템에 들어갔던 나는 20억원을 가지고 회사를 나왔다.
다시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나는 성공한 신뢰 받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 였다. 적어도 돈을 버는 일에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들이었다. 아이들과 와이프는 당시에 불던 조기영어 공부로 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내가 돈을 좀 벌었다는 소문이 났는지 동창들과 예전의 동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종신 보험을 소개하기 위해 오는 친구들이었다. 별 할 일이 없으니 낮에는 그런 애들 이야기 들어주고 밤에는
뭐 투자할 만한 데 없나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느라 그냥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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